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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周時經) 1876.12.22 황해 봉산 ~ 1914.7.27 서울 국어학자·국어운동가·교육자.

  • 본관은 상주(尙州). 아명은 상호(相鎬). 자는 경재(經宰), 호(일명이기도 함)는 학신(學愼)·한힌샘·일백천(一白泉)·백천(白泉)·한흰메·태백산(太白山).
    12세에 서울에 있던 작은아버지 면진(冕鎭)의 양자로 입양되어 한문을 배웠다.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 1898년 6월 역사지지특별과를 졸업하고 1900년 6월 보통과를 졸업했다. 배재학당시절 독립신문사에서 서재필의 언문조필로 있으면서 철자법을 통일할 목적으로 1896년 국문동식회를 신문사 안에 설립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7년 지석영이 만든 국어연구회의 회원으로 4개월간 활동했으며, 같은 해 7월 학부(지금의 교육부) 내의 국문연구소 주임위원으로 임명되어 3년 동안
    국문연구안을 작성·제출·토의했다. 상동청년학원 안에 개설된 하기(夏期)국어강습소의 졸업생과 유지들을 규합하여 1908년 국어연구학회를 조직한 후 2년 동안 이끌었다. 국어연구학회는 1911년 조선언문회(배달말글몯음)로, 강습소는 조선어강습원으로 개칭되었다가 1913년 학회의 이름이 한글모로, 1914년 조선어강습원의 이름이 한글배곧으로 다시 바뀌었다.
    이 단체들의 회장이자 강사로서 많은 제자들을 키워냈다.
  • 1909년에는 J.S.게일, 다카하시[高橋亭] 등과 더불어 한어연구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화학당·흥화학교·기호학교·융희학교·중앙학교·휘문의숙·배재학당 등에서 강의를 했으며, 상동교회 내의 상동청년학원과 여러 강습소를 중심으로 국어 강의를 전개했다. 1900년 상동사립학숙에 국어문법과를 부설하고 1907년 여름에 상동청년학원의 국어강습소, 같은 해 11월 같은 학원에 설치된 국어야학과, 1908~09년 국어강습소, 1910년 재령 나무리강습소 등의 많은 강습소를 통해 음학(音學)·자분학(字分學)·격분학(格分學)·도해학(圖解學)·변체학(變體學)·실용연습 등을 가르쳤다. 그에게서 직접·간접으로 배운 사람들은 김두봉·이규영·최현배·김윤경·권덕규·신명균·장지영·이필수·김원우·정열모·이윤재·이병기·김두종·백남규 등이다.

연구활동과 학설

큰사전 ㅎ~핸드-백 8호

1890년 15세에 국문을 처음 배워 토 '과·와'의 구별을 깨닫고 우리 말과 글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7세에 한문과 영어를 배우면서 어려운 한문 대신 국문을 쓰고, 알파벳을 국문에 적용해서 자모음을 풀었으며 모음이 분합(分合)됨을 알았고 아래아()가 'ㅣ'와 'ㅡ'의 합음(合音)일 것이라고 깨달았다. 1893년 <국어문법>을 저술하기 시작하여 1898년 12월 개성(槪成)했다(이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음). 주시경의 연구분야는 크게 3가지로 나뉘는데 첫째, 문자론과 표기법, 둘째, 음학(소리갈)과 문법론(기난갈과 짬듬갈), 셋째, 사전편찬이다.

이 세 분야의 연구는 어문생활을 바로잡고 교육할 목적으로 행해진 것으로서 그 필요성은 이미 1897년의 <국문론>에서부터 강조되어온 것이었다. 첫번째 것은 특히 <국문론>·<국문연구>를 통해서, 2번째 것은 <대한국어문법>·<국어문전음학>·<국어문법>·<말의 소리> 등을 통해서, 3번째 것은 현재 원고 상태로 그 일부가 전하고 있는 <말모이>를 통해서 살펴 볼 수 있다. 그가 17세에 모음의 분합을 깨우쳤다는 기록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국어 현상에 대한 그의 서술방식은 원소적인 단위가 모여 더 큰 단위를 이룬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분석적이고 체계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음학·기난갈·짬듬갈 등에 두루 적용되었다.

그는 소리를 적는 문자(記音文字)와 뜻을 적는 문자(記事文字)를 나누고 기음문자가 훨씬 훌륭한 것이니 한자 대신 국문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립신문>에 연재한 <국문론>에서 이미 그는 통일된 표기법의 사용을 역설했다. 먼저 말의 '경계'를 찾아 적어야 하는 것(즉 連綴을 하지 않고 分綴을 해야 함)을 여기에서는 명사류와 조사류 사이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으로 인식했지만, <국문문법>·<대한국어문법>부터는 용언의 어간과 어미 사이에서도 이루어져야 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의 심화는 이미 중세국어 단계에서부터 근대국어 단계를 거쳐오면서 우리 선인들이 국어 표기법을 발전시켜온 전통에서 나타난 것이었으나 그는 자기만이 그러한 생각을 한 것으로 믿었다. 또한 그는 'ㄺ·ㄻ·ㄼ' 외에 'ㄷ·ㅅ·ㅈ·ㅊ·ㅌ·ㅍ·ㅎ·ㄲ' 등도 새 받침으로 사용되어야 함을 논의했다. 이와 같이 말의 경계를 살펴 특히 어간은 본음(本音)을 가지는 형태로 고정시키되, 'ㅊ·ㅍ·ㅎ' 등의 새 받침도 표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본음의 이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마지막 저서 <말의 소리>에 가면 단순화되는 변모를 겪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식상 다소간의 변모를 보이기는 하지만 그는 'ㅏ·ㅓ·ㅗ·ㅜ·ㅡ·ㅣ'를 모음의 단음(單音)으로, 'ㄱ·ㅇ·ㄷ·ㄴ·ㅂ·ㅁ·ㅈ·ㅅ·ㅎ·ㄹ'을 자음의 단음으로 보고 그밖의 것들은 이런 기본단위들이 합성되어 이루어지는 것으로 파악했다. 특히 모음 ''는 'ㅣ'와 'ㅡ'의 합음으로, 'ㅿ'은 'ㄹ'과 'ㅎ'의 합음으로 보았는데, 이는 차서(次序)와 규모(規模)를 중시하는 그의 철저한 수리적(數理的)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공시적인 것과 통시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결과도 사실과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러한 통시적 현상에 대한 고려는 1914년의 <말의 소리〉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게 된다. '철·코·탕·풀' 등의 어두 자음들은 결코 '···'으로 재음소화(再音素化)되어 이해되지 않는 것이지만 음절말의 'ㅊ·ㅋ·ㅌ·ㅍ' 등은 위와 같이 재음소화되는 것으로 이해하여 '좇고·깊고' 등이 '[좃고], [깁고]' 등으로 실현되는 것을 설명하려고 했다.

' 기난갈'의 기본단위는 '기'(후에 '씨'로 고침)이다. '기'의 종류는 처음에 7개에서 9개로 바꾸었다가 나중에 6개로 수정했다. 이 '기'는 어휘형태소적인 것에 약간의 문법형태소적인 것을 포함하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의 분석적인 서술방법은 '기'를 분석하면서 '기난갈'의 가운데에 '짬듬갈'을 두고 설명한 점에서도 볼 수 있는데, '기'가 단어적 측면과 문장적 측면에서 모두 기본단위가 됨을 인식한 데서 이러한 방식이 취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기'가 모여 문장을 구성하면 '드'가 된다. '드'와 '드'가 모이면 더 큰 '드'를 이루게 된다. '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듬난'을 두고 문장의 '듬'을 분석해야 한다. 복합된 문장 가운데 밖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숨은 뜻'이나 '속뜻'으로 있는 것인데 '말'을 그것이 표현하는 '일'과 관련시켜 그림으로 도해하여 풀고 그것도 잘 안 될 때는 말한 사람의 '마음'을 살펴서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그는 조선광문회에서 <신자전 新字典> 의 국어풀이를 제자 김두봉과 함께 맡아보았으며, 최초의 국어사전인 <말모이> 역시 제자인 김두봉·권덕규·이규영 등과 더불어 편찬했다. 1911년부터 편찬이 시작되어 어휘수집에서 주해까지 진행되었으나 1914년 그가 죽자 출판되지 못하고 원고 상태로 있다가 현재 전하는 것은 첫권밖에 없다. 그의 제자들은 1921년 조선어연구회(후에 조선어학회로 개칭됨)를 설립했다. 그의 초기 표기법 이론인 본음이론은 1933년 조선어학회에서 공표하여 시행하게 된 '한글맞춤법통일안'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의 이론은 상당히 독창적인 것이었는데, 특히 <말의 소리> 에서 제안된 음의 기본단위인 '고나', <국어문법> 에서 시편 의미를 바탕으로 한 정밀한 구문도해, 형태의 기본단위인 '늣씨', '씨'와 '씨'를 구분하는 표지인 중권점과 우권점, 합성어의 단위들을 잇는 표지인 '벌잇', 문장의 심층적 성분이 반영된 '숨은 뜻'과 '속뜻' 등의 개념은 뛰어난 것이었다. 그는 '고나'·'기'·'드' 등을 일종의 기호로 파악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일부만이 그 후계자들에 의해 수용되었을 뿐이다. 그의 독창적인 연구는 제대로 계승·발전되지 못했고 1930년대 이후에는 외래이론에 기댄 국어연구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1960년대까지는 그를 추모하는 정도에 머물다가 1970년대 이후 그의 연구업적들을 많이 발굴해내고 종합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새로이 조명하게 된 것은 단지 그가 국어학의 선구자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연구가 독창적이어서 현대적 관점에서도 되돌아볼 만하다는 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사상

그는 당시 암울한 시대적 배경하에서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의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민족적 자각과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어·국문의 연구와 그 보급을 통해 국민을 계몽시키고 민족의 상징인 민족어를 통해 민족적 통일을 꾀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어문민족주의를 표방한 애국계몽사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는 사회·민족·국가를 온전히 보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그 바탕이 되고 힘이 되는 말과 글을 녹슬지 않게 수리(受理)하는 이언(理言:말을 갈고 닦아 다스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구에서 유행하던 사회진화론이 한국에 막 도입되던 개화기 때 그는 서재필·유길준, 중국의 양계초(粱啓超) 등의 영향을 받아 사회도 진화, 발달해 나간다고 믿고 있었다. 구역(句域)·인종(人種)·언어가 삼위일체로서 그것을 바탕으로 하나의 사회와 국가가 '천(天)이 명(命)한 성(性)'에 따라 형성되기 때문에 한 사회·국가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요소 각각의 순수성[國粹]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했다. 구역은 민족과 국가 독립의 기(基)요, 인종은 그 독립의 체(體)요, 언어는 그 독립의 성으로, 그 가운데 독립의 성인 언어가 가장 중요하여 무엇보다 먼저 말과 글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과 글을 잘 수리하여 보전한 민족은 부강해지고, 그렇지 못한 민족은 빽빽한 공기가 성긴 공기를 침투해 들어가듯이 다른 나라에 국가를 빼앗기게 된다고 그는 역설했다.

이러한 사상은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 그 여파로 고종황제가 양위하고 한일신협약이 맺어지면서, 일본의 차관정치가 시작되고 나서 한층 더 가열되어 실천으로 옮겨졌다. 이해에 중국 양계초의 <안남망국사>를 번역하여 <월남망국> 로 간행한 것도 그와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국어·국문의 연구와 그 보급에 더욱 힘쓰고 한글을 전용하며 한자어 용어를 한글로 된 새로운 용어로 대체하며 새로운 한글의 가로풀어쓰기를 시험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도 외래적인 그리스도교에서 민족적인 대종교로 개종했고, 이름까지도 한힌샘이라는 한글식 이름으로 고치게 된 것은 이러한 사상이 극단적으로 잘 나타난 것이다.

저서

저서로는 <국문문법>(1905, 필기본)·<대한국어문법>(1906)·<월남망국j>(1907)·<국어문전음학>(1908)·<말>(1905~08)·<한자 초습>(1908)·<국문초학>(1909)·<고등국어문전>(1909)·<국어문법>(1910)·<조선어문법>(1911, 1913)·<소리갈>(1912경)·<말의 소리>(1914) 등이 있으며, 논설 및 논문으로는 <국문론>(독립신문, 1897. 4. 22~24, 1897. 9. 25~28)·<말>(1901)·<사람의 지혜와 권력>(신학월보, 1902. 2. 9)·<국문>·<력>·<지디문답>·<평론>·<위>·<론셜>(가정잡지, 1906. 6~ 1907. 1)·<국어와 국문의 필요>(서우, 1907)·<필상자국문언>(황성신문, 1907. 4. 1~4. 6)·<국문연구안>(1907~1908)·<국문연구>(1909)·<한나라말> (보중친목회보, 1910)·<조선어에 관한 참고문>(신문계, 1913. 1. 3) 등이 있다.

참고문헌

주시경전집 상·하 : 이기문, 아세아문화사, 1987
주시경선생유고 : 주시경, 민속원, 1987
주시경 선생의 생애와 학문 : 허웅 외, 과학사, 1980
주시경연구 : 김민수, 탑출판사, 1977
주시경전 : 김세한, 정음사, 1974
주시경의 애국계몽사상 <한국현대사회사상> : 신용하, 지식산업사, 1984
주시경의 학문에 대한 새로운 이해 <한국학보> 5 : 이기문, 일지사, 1976